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世界記錄遺産) 9 -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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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世界記錄遺産) 9 -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5·18 민주화운동
요약 :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군사독재와 통치를 반대하고, 계엄령 철폐, 민주정치 지도자 석방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대통령 대행체제가 이어졌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을 틈타 신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 등)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12·12 사태). 무력으로 순식간에 군부와 정치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다시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유신체제에 이어 민주 헌정이 정지되고, 민주정치 지도자들이 투옥되는 등 군사독재가 재발하자 국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는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지속·확산 되어 갔다. 1980년 5월 15일 전국의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으며,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1980년 5월 17일 비상국무회에서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의결하였다.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의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한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비상계엄군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들이 속출하자, 학생들은 '계엄 철폐','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의 중심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은 학생시위대를 지지하는 일반 시민들도 구타하고 체포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들이 발생하였다.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조하며 금남로에 모여들었으며, 계엄군과 투석전(投石戰)을 전개하였다. 계엄군과 시민 간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는 점점 격화되어 갔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이 사망하였으며,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였다.
1980년 5월 21일 시위대 대표가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도청 앞에서 도지사(道知事)와 협상을 벌였으나 계엄군이 오후 12시까지 퇴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렬되었다. 이후 이어진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 발포로 인해 사상자 및 부상자들이 속출하였으며, 이 집단 발포 이후 시위대는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나주, 화순 등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을 시작하였다. 시위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결국 무력항쟁으로 변하였으며,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계속해서 계엄군을 압박해 간 결과,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 시내를 장악하였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종교인,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5.18 수습대책위원회’가 1980년 5월 23일에 구성되었으며,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종용하여 무장해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이 수습위원회의 요구조건은 받아들이지 않고 시위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수습위원회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 대립하게 되었다. 온건파는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강경파는 '김대중 석방','계엄령 해제','정치일정 단축'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립의 결과 투쟁파인 강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구성된 새로운 지도부는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시민군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1980년 5월 27일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 진압군이 시내로 진입하여 도청과 시내를 장악함으로써 결국 시위는 진압됐다.
시위 기간 동안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외부에 즉각 알려지지 않았으나 광주 시내를 탈출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 소식들이 조금씩 전해졌다. 처음에는 유언비어(流言蜚語)처럼 전해지면서, 북한 무장간첩이 침투하여 저지른 만행이라고 소문나기도 했으나 3일째 되는 날부터 언론에 보도되어 알려졌다.
5월 23일(금)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시민 5만여 명 도청광장 집회.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 시내 전역에 살포. 최초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토) : 공수부대원,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 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일) :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 만장일치 채택.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 논의.
5월 26일(월) : 계엄군,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 귀가시킴. 시내전화 일체 두절.
5월 27일(화)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가두방송. 금남로에서 시가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 시민군에 무차별 사격. 계엄군, 도청과 시내 전역 장악, 진압 작전 종료.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시내전화 통화 재개.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5·18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 (두산백과)
◉ 우리나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6건)
1. 훈민정음(1997)
2. 조선왕조실록(1997)
3. 직지심체요절(2001)
4. 승정원일기(2001)
5. 조선왕조의궤(2007)
6.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2007)
7. 동의보감(2009)
8. 일성록(2011)
9.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2011)
10. 난중일기(2013)
11. 새마을운동 기록물(2013)
12. KBS이산가족찾기 기록물(2015)
13. 한국의 유교책판(2015)
14. 조선왕조어보(2017)
15. 국채보상운동 기록물(2017)
16. 조선통신사 기록물(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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