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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人類無形文化遺産) 8 – “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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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울산한마음복지재단
작성일21-05-07 09:25 조회1,0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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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人類無形文化遺産) 8 처용무

[처용무]

요약 : 통일 신라 시대부터 최소 1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처용무는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추는 무

용으로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궁궐에서 열렸던 일종의 의식이었다. 새해를 맞으며 악귀를 몰아내고 왕실의 평화를 기원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처용무는 궁중 연회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선조들이 얼마나 수준 높은 예술과 고유한 풍습을 중시했는지를 보여준다.

구 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국 가

대한민국

등재연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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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는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추는 무용을 말합니다. 처용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에 실린 통일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용의 아들인 처용은 밤늦게 집에 들어가려다 방에 발이 4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2개는 아내의 발이고 2개는 역신(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의 발이었지요. 처용은 화를 내지 않고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고, 역신은 처용의 인품에 놀라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용무는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궁궐에서 열렸던 일종의 의식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악귀를 몰아내고 왕실의 평화를 기원했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처용무는 악귀를 몰아내는 의식을 넘어 궁중 연회에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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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를 발전시킨 세종대왕

처용무는 통일 신라 헌강왕 때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아, 최소 1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통일 신라 때는 궁궐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새해를 맞아 평화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처용무는 커다란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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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변화를 맞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처용무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규모도 확대시켰습니다. 혼자서 추던 춤을 다섯 명이 함께 추도록 했고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던 음악도 정리했지요.

 

이후 성종에 이르러 처용무는 보다 큰 규모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는 처용무와 학무, 연화대무를 결합하여 학연화대 처용무합설이란 이름으로 궁궐에서 호화로운 의식을 개최하였지요.

세종 이후 처용무는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가면, 의복을 비롯하여 춤과 노랫말, 악기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것들이 도입되거나 보완되었지요. 그러던 중 일제 강점기를 맞게 되면서 위기에 처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용무는 고집스러운 춤꾼들에 의하여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궁궐에서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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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전용 춤, 처용무

일반적으로 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여성입니다. 하지만 처용무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남성들만 춤을 춥니다.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까지는 혼자서 춤을 췄지만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다섯 명이 함께 춤을 추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다섯이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시점을 영조 때로 주장하지만 일반적으로 세종 때로 보고 있습니다.

다섯 사람이 펼치는 처용무는 통일성이 중시되었던 춤입니다. 처용무를 추는 춤꾼들은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었습니다. 청색은 동쪽, 흰색은 서쪽, 붉은색은 남쪽, 검은색은 북쪽, 노란색은 중앙을 상징했지요. 얼굴에 가면을 쓰고 머리 위에는 꽃과 열매가 달린 사모를 썼습니다. 그리고 모두 손에는 백한삼(흰색으로 된 천)을 끼고 춤을 추었습니다.

다섯 명의 춤꾼들은 각각 동서남북과 중앙에 자리하지요. 가면을 쓰고 자리를 잡은 춤꾼들은 장구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다섯 명은 모두 허리를 구부리며 팔을 하늘로 쳐들었다가 무릎 위에 놓지요. 이런 동작의 춤이 계속 이어집니다.

 

물론 춤이 마무리되는 시점이나 중간에 위치를 바꾸거나 춤사위가 바뀔 때도 통일성을 유지하지요. 세종 때는 궁궐에서 추었던 유일한 춤이 처용무였답니다.

처용무를 추는 춤꾼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썼습니다. 바로 처용을 상징하는 가면입니다. 가면을 쓰는 것은 바로 처용의 높은 인격에 감탄한 역신(귀신)이 처용의 얼굴만 보아도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설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대문에도 역신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처용 그림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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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와 함께 온 음악

처용무에 사용되었던 음악도 춤과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처용무가 궁궐의 공식 행사로 인정된 것은 조선 세종 때였습니다. 세종의 명령으로 윤회라는 사람이 봉황음이라는 음악을 고쳐 만들었습니다.

 

원래 봉황음은 누가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봉황음은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조선 왕조와 조선의 문화를 담고 있지요.

성종 때 쓰여진 조선 최고의 음악 서적인 악학궤범에는 봉황음을 비롯하여 처용무에 사용되었던 여러 음악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다양한 음악들이 처용무에 사용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음악이 불교 음악입니다. 영조와 정조 때는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영산회상, 미타찬, 관음찬 등이 처용무에 사용되기도 했지요.

다양한 음악이 도입되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도 처용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다섯 명이 춤사위를 펼치는 오방처용무에 참여한 악공은 67명이나 되었습니다. 가야금, 거문고, 당피리, 대금, 동발, 장구, 아쟁, 퉁소, 해금 등 쓰인 악기도 자그마치 20종이나 되었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처용무는 1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통과 맥을 이어 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수준 높은 예술과 고유한 풍습을 중시했는지 잘 보여 주는 전통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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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처용무(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11. 5. 10., 이형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

 

200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Convention for the Safeguarding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에 의거하여,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대표목록 또는 긴급목록에 각국의 무형유산을 등재하는 제도.

2005년까지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프로그램 사업이었으나 지금은 세계유산과 마찬가지로 정부 간 협약으로 발전.

 

 

우리나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2009)

남사당놀이(2009)

영산재(2009)

제주칠머리당 영등굿(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2010)

줄타기(2011)

택견(2011)

하산모시짜기(2011)

아리랑(2012)

김장문회(2013)

농악(2014)

줄다리기(2015)

제주해녀문화(2016)

씨름(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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